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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야설(野說)조선족 5 : 조선족, 한국을 접하다
공유2016.01.19 00:57조회수:9688

포털사이트 검색으로 찾은 글을 공유 해드립니다.

글쓴이 동의하에 글을 퍼왔습니다.

작성자:Spook
출처:http://www.ddanzi.com/

1980년대 중반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어렸던 나는 방학이면 시골에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학원도 없었던 시절이라 샐러리맨이었던 부모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외갓집은 시골 동네였다. 아침 이슬이 채 사라지지 않은 아침시간에 동네 귀퉁이를 뛰어다니다 보면 놀란 잠자리들이 날아오르다가 자기들끼리 부딪쳐 떨어지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한다. 나 역시 어느 소설을 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나 사실은 사실이다.


외할아버지는 밤만 되면 외줄이어폰(예전에는 스테레오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어폰도 외줄이었다)으로 소형라디오(소형이라고 하지만 벽돌 2개 크기였다)를 들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무엇을 듣는지 너무 궁금했고, 온갖 재롱을 다 떨어서 겨우 들어볼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건 우리말이 맞기는 한데 이쪽 동네서 쓰는 억양보다 좀 부드럽고, 사람의 목소리보다 잡음이 더 많이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 때 나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해 그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중국이 문화혁명을 끝내고 개혁과 개방을 시작한 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조선족들이 한국을 접할 수 있는 수단은 라디오 밖에 없었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야 편지를 할 수 있었고, 편지가 가능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도 가능해졌다. 전화는 요즘과 같은 자동교환이 아닌 인공교환이었다. 지역마다 인공교환을 통해가야 했기 때문에 전화 한 번 하려면 3~4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도 소수 중의 극소수만 그 방법을 알았고 대부분은 한국의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물론 홍콩이나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람도 있으나 그건 녹색털 판다가 태어나는 경우보다 더 적었다.


조선족 사회에 본격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린 것은 88올림픽이었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이 동네엔 컬러TV를 갖고 있는 집이 몇 개 없었다. TV 보려고 매일 저녁 옆집으로 출근했던 시절, 같은 민족의 나라가 세계적인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사실은 조선족 사회에 상당한 울림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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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중인 노태우 대통령과 장쩌민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진출처- 중앙일보)


드디어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은 중국과 수교를 맺는다. 정보가 적어 당시 한국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한다. 수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의 ‘선원모집’과 ‘산업연수 제도’가 조선족 사회를 흔들기 시작한다. 눈에 뜨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연수보다 더 먼저 시작된 것은 원양선원 모집이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학습과정을 거치면 한국 선사에서 선원으로 최소 2년을 일할 수 있었고, 월급은 300~500불 좌우였다. 그것도 선원이 돈을 다 써버리는 경우를 대비하여 200~400불은 가정으로 부쳐주고 100불 정도만 선원 본인에게 줬다.


1992년 수교 당시의 데이터는 없으나, 1994년 연변지역의 연간평균소득은 인민폐(위안화) 4,000원(400불), 한국은 10,000불이 넘었으니 조선족을 쓰는 건 한국에게도 이익이었다. 비록 수속이나 학습과정에 일정한 비용이 들기는 하였으나 조선족으로서는 고민할 필요가 크게 없는 괜찮은 출로였다.


페스카마호 사건(1996)도 이쯤 일어난다. 흉악범죄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나 페스카마호 사건을 조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한국의 평균소득은 조선족 평균소득의 최소 20배는 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임금을 지급하거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 보았을까가 의문스럽다. 폭행, 폭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으로서의 조선족 가치는 낮게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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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카마호 사건은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에서 벌어진 선상 반란 사건으로,

가혹한 업무 조건을 견디지 못한 조선족 선원 6명이 한국인 선원 7명(선장 포함)과

외국인 선원 3명을 포함한 선원 11명을 살해했다.


반대로 조선족은 당시까지만 하여도 국유경제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열심히’의 참뜻을 몰랐다. 모두가 국가의 것인 만큼 굳이 내가 인심을 잃으면서 쓴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또 쓴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늘 인간다운 대접은 받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선원으로 나갔던 사람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나, 동네서 술 먹고 싸움질이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뻔하지 않은가? 처음 돈의 맛을 안 사람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돈의 힘까지는 몰랐으나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았던 사람들의 만남. 그들의 갈등은 페스카마호 사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만든다.


페스카마호 사건에 유일한 생존자가 있다. 증언에 따르면 그가 가장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무작정 사람의 창자를 빼먹는,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조선족은 아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세월이 좀 더 지나면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KBS의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작을 어디에선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중수교와 함께 조선족 사회는 이 프로그램에 주목한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혈육을 찾는데, 이른바 친척방문이 시작된 것이다.


친척방문 제도는 선원제도와 산업연수제도와 함께 조선족 사회가 한국와 접하는 기회를 마련했고, 상당한 부도 가져다준다. 수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진 한국에서 1년 정도 돈을 모으면 중국에서 아파트 한 채 정도를 살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조선족 사회에 공헌한 점이다. 물론 그만큼 중국의 집값이 쌌던 것도 있다. 계획경제 하에서는 국가에서 집까지 배분하였으니 말이다.


20배 이상의 소득에 조선족 사회는 한국을 황금거위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한국에서 이른바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중반까지도 거의 열리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횡포에 가까울 정도로 입국을 막았기 때문에 한국비자를 받는다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기보다 어려웠다. 브로커가 성행했고, 여권에 박힌 사진을 교체하는 것이 범죄라면 가짜결혼(가짜이혼)은 합법적이었다.


90년대 후반부터 ‘가짜결혼’이라는 이름의 진짜 이혼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탈 없이 살던 남편과 이혼을 하고 한국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행을 했다. 이 코리안 드림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한국의 시골 총각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중국에 와서 잘 먹여주고 잘 놀게 해주고 결혼증만 받으면 돈까지 주는데 마다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첫날밤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조선족 사회의 1차 파탄은 시작되고,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2차 파탄, 즉, 초창기 한국으로 갔던 사람들의 2세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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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수교 이후, 대기업을 포함한 많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주목했고, IMF사태가 터지면서 기업들이 대거 중국에 진출했다. 한 10년 정도 절실하게 통역을 필요로 했던 시기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당시까지만 하여도 중국어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말로 뭐든지 처리가 가능했다.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런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이나 전문용어나 특수용어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마찬가지였다. 67년 문화혁명으로 중국 대학이 문을 닫았고, 10년 정도 후인 78년에 대학입시를 회복했다. 82년 정도에 제1회 졸업생이 나왔고, 이들 대부분은 대학교수로 남았다. 그리고 그들이 배출해낸 학생들이 한중교류가 늘어나는 시기에 대량으로 투입되었다. 물론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의 완전한 단층은 지금까지도 학문의 기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중국의 대학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온 투자자들은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못되었다. 그들은 중국인과의 소통이 절실히 필요했고 가교역할을 할 언어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조선족은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 들어갔다. 스펙 좋은 사람만 뽑는 삼성이나 현대도 당시에는 조선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졸업장을 본다고는 하나 졸업장 위조가 많았던 90년대, 그냥 그렇게 취직된 조선족도 상당수 있다.


기본적으로 수준 이하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득의 차이도 크다 보니, 조선족의 입장에선 자신들 평균소득의 몇 십 배를 쓰는 사장님이 그냥 돈 많은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금전출납을 관리하는 재무담당자가 튀거나, 사기에 심지어 납치까지도 일어난다.


비슷한 시기였던 90년대 말, 러시아와 붙어 있는 지정학적인 혜택(?)으로 한국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러시아가 받아준다. 물론 단순 노동이 아닌 무역으로. 조선족은 공산품 보따리장수로 러시아에 등장한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고된 것이었다면 러시아의 생활은 위험한 것이었다. 총기규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데다 살인과 강도도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조선족들은 러시아로 향했고, 벌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혼도 한다.


조선족 사회에서 일본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비슷한 시기였던 90년대 말, 일본은 학생이 줄어들면서 대학들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예측하고는 중국에서 대량으로 학생을 모집한다.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일본은 이상하게 조선족들을 먼저, 또 가장 많이 데려간다. 초창기에는 비자를 약간 어렵게 주는 듯 하다가 2000년을 이후에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오라는 형국을 취했다. 덕분에 조선족 십만 명 가까이가 일본에 갔다. 그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가장 활력 있는 층으로. 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일본에 남거나 일본인과 결혼했다.


조선족들은 이렇게 한국으로, 러시아로, 일본으로, 한국 기업에 취직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으로 향한다.


계속….



한숨만 나오는 역사다. 재미나는 이야기나 하고 가자. 올해 1월 1일부터 중국 증권감독회에서 처음으로 ‘서킷브레이크’를 도입했다. 종합주가가 5% 하락하면 15분 정지, 다시 2% 더 하락하면 완전 폐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래일 4일에 2번이나 서킷브레이크가 발동되면서 주가가 평균 20% 가까이 하락하였다.


이에 중국소셜망인 위챗에는 이런 유머가 돈다.


“세상에는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정권이 많은데, 1등이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이고, 2등이 일본 731부대고, 3등이 중국 증권감독회다.”


작성자:Spook
출처:http://www.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