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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지금의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을 통틀어서 ‘만주(滿洲)’라고 불렀던 것 같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어원이 무척이나 복잡하다. 어원에 대하여 알아둘 필요가 있겠으나 그냥 한자를 해석해도 진짜 괜찮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 그득 찬 넓은 땅’, 참 있어 보이지 않는가? 진짜 그렇다. 만주지역에는 무엇이든 많다. 1년에 5~6개월 정도 추운 것 빼고는 아쉬운 것이 별로 없는 지역이다.
가끔
역사책엔 만주의 동북지역에 있는 ‘간도’가 나온다. 서간도와 동간도로 다시 나뉘어지는데, 쉽게 가자. ‘간도’는 오늘날의 연변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범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슷하다.
빨갛게(우측상단) 표시된 곳이 연변조선족자치주다.
연변의
중국내 공식적인 행정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이고 면적은 대한민국의 반에 조금 못 미친다. 상당히 크다. 전체 인구를 다 합쳐도 200만이니까
널찍한 편이다.
서구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州)’를 미국의 ‘주’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성(23개),
자치구(장족, 몽고족, 회족, 티베트, 위그르 등 5개), 직할시(상해, 북경, 천진, 중경), 특별행정구(홍콩, 마카오)가 최상위의
행정개념이다. 조선의 8도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의 하위 개념으로 대도시(행정적으로 구가 설치되어 있는 도시)와 자치주가 있다. 그리고
대도시와 자치주 하위에는 현 또는 현급시(구가 설립되어 있지 않은 작은 시, 사실상 현)가 있다.
이처럼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미국의 주, 한국의 도와 같은 최상위 행정개념이 아닌 2위의 개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하위에는 3위인 8개의 현급시가 있다.
용정, 화룡, 안도, 도문, 왕청, 훈춘, 돈화, 연길이 있으며, 이 중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에 속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립은 1955년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1952년을 창립된 해라고 축하한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계산하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사연을 알기 위해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만들어진 경위를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덕해’라는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분류된 사람 중 몇 안 되는 유명한
사람이다.
자치주 정부 앞에 있는
주덕해 동상
주덕해의
본명은 오기섭이다. 어떤 은인의 성을 따서 주덕해라고 바꿨다는 설도 있고, 항일시기의 가명을 그대로 썼다는 설도 있는데,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그의
평전에 따르면, 1911년 3월 5일(음력)에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연변으로 왔는지에 대하여 평전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찾아보면 어찌어찌 나올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평전의 내용 이상으로 적고 싶지는 않다.
주덕해는
꽤 어릴 때 공산당에 가입한 것 같다. 1930년, 그러니까 그가 19살이 되던 해에 공산당청년단에 가입했고, 20살에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어 2년 뒤인 1932년에는 흑룡강성 우가툰공청단 특별지부 서기를 역임한다. 조상님의 못자리가 좋았던지 22살부터 1972년 폐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문화혁명시기였던 6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직에 머물렀다. 그의 이력에선 1937년 모스크바 동방노동자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점, 1943년
조선혁명군정대학교 총무처장을 했다는 점, 1945년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어 다시 동북지역으로 왔다는 점이 눈에 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세계에 알렸을 때 주덕해는 지금의 연변지역에서 지방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연변지역에
지방정부를 수립하기 이전에 동북행정위원회라는 큰 범위의 공산당 정권이 있었다. 그는 체계화된 하부정부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1952년 9월 3일, 최상위 행정조직인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창립된다.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설명하기 전에 몇 가지 알아둘 것이
있다.
사실
오늘날의 중국은 1949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더 이전에 완성됐다. 다만 동북지역을 포함한 상당히 넓은 땅을 이미 그 이전에 먹었으나 미처
해치우지 못한 땅이 있어 그 날짜를 맞춰 정부수립을 하느라고 1949년까지 기다린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다른 자료를 찾아보기
바란다.
도대체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어떻게 만들어 졌냐고? 중국엔 지금도 ‘정치협상회의’라는 제도가 있다. 공산당이 아닌 나머지 세력들을 전부 묶어서 한 테이블에
앉히고 공산당의 문제점이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 같은 것에 대해 의견을 듣는 제도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건국 이전의 정치협상회의와 건국
이후의 정치협상회의는 다르다는 것을….
중국은
건국 이전의 정치협상회의에서 ‘민족이 많기 때문에 자치구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로 인해 1947년 중국에 처음으로 내몽골
자치구가 만들어진다(아련한 역사가 있다. 건국 전에 이미 자치구가 만들어 진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1950년에는 사천갈제장족 자치주,
1951년에는 옥수장족 자치주가 만들어진다.
주덕해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공산당 혁명에 참여한데다 인구도 많았던 조선족은 충분히 자치구를 만들 자격이 있었다. 실제로 자치구를 만드는 과정에
논의가 많았던 것 같다. 자치구를 만들었다가 소련식의 자치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장,
중공연변지방위원회 서기, 연변독찰전원공서 전원(專員, 전문책임자로 보면 된다)으로 있던 주덕해는
<길림성연변조선민족집거구역자치설치계획>,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대표대회의 조직조례>,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
조직조례>등의 초안을 만들면서 자치구를 만들기에 돌입한다.
1952년
8월 9일 모택동은 주석령으로 ‘중화인민공화국민족구역 자치실시요강’을 공표하였고,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설립도 가시권에 들어온다. 8월 21일
조선족자치구준비위원회 회의가 개최되면서 자치구의 창립은 확정되고 주덕해는 자치구 주석이 된다. 그리고 9월 3일을 자치구 창립일로
지정한다(1985년부터 연변에만 있는 법정휴일이었으나 30년만인 2015년부터는 국가에서 2차세계대전 기념일로 지정하는 바람에 우리만 있던
휴일이 날아가 버렸다). 당시 연변의 인구 85만 4000명중 조선족은 62%인 52만 명이었다고 한다.
2012년 자치주창립
60주년을 맞아 신축한 자치주 정부청사
누가
뭐래도 자치구를 만들기 위한 주덕해의 노력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덕해는 문화혁명시기였던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반역자 누명을 쓰고
온갖 박해를 받는다. 그리고 3년 뒤 폐암으로 사망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마스코트
(예전에는 사슴으로 알았는데 소란다)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이상한 논리로 인해 1955년, 한 단계 낮은
자치‘주’로 바뀐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연변조선족자치구는 길림성 정부의 통제를 받았는데, 원래 자치구는 중앙정부의 직접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럼
중앙정부의 직접통제를 받도록 하면 되는데 역으로 통제는 변경하지 않고 자치구를 자치주로 한 단계 낮춘다. 자치구와 자치주가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다르다. 중국의 특성상 뭐든지 큰 것이 좋은 법이다. 당연히 관계부처장의 관직도 높다.
자치지역을
만들었다는 자체로만도 주덕해는 조선족, 특히 연변지역 조선족의 높은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버티거나 인맥을 활용하거나 하면서라도
자치구를 유지하였다면 진짜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야설만을
적으려고 했는데 이야기 전개상 정설을 적고야 말았다. 연도를 찾느라고 어지러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