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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야설(野說)조선족1-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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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9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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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pook
출처:http://www.ddanzi.com/

[논의]야설(野說)조선족


들어가며

나는 조선족이다. 그것도 조선족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연변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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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조선족과 조금이나마 다른 점을 꼽으라면, 보통 조선족 5~6세대이거나 이주 세대를 알 수 없는 것과 달리, 나는 이민 3세대 밖에 되지 않고 24살부터 34살까지 만 10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조부모가 일본이 패망하기 전인 40년대 초반에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하니 6.25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들어온 것은 아닌 것 같다. 항일을 하거나 하려고 중국 땅에 들어왔다면 후세를 살아가는 내가 조금이나마 뿌듯하겠으나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다. 윗세대는 그저 그런 서민이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아버지와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조선족이 되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도 중국이라는 울타리에 갇히면서 조선족으로 분류되었다.


내가 24살부터 34살까지 만 10년을 한국에서 보냈다는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보낸 10년이 이 글을 쓰는 나의 생각이나 시선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았던 10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식당에서 접시를 나르는 일을 한 적이 없다. 즉,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지출만 있었다.


그렇다고 돈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학교에서 먹고살 만큼의 돈만 대주었다. 그래서 하루 12시간 이상씩 학교에만 붙어 있었다. 한국 국적의 사람들이 계절 따라 한다는 벚꽃 구경이요, 바캉스요, 단풍구경 따위를 다녀본 적이 없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도 두 번밖에 없어서 제목까지 기억이 난다. 누가 티켓을 주어서 봤던 설경구의 <열혈남아>와 3D로 흥행하였던 <아바타>가 전부다.


그렇다고 학교 일정이 엄청 바쁜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주는 돈은 공부하는데 필요한 만큼인데 학교 밖의 소비는 학교 내 소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워낙 움직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생물학적인 특성도 큰 작용을 했다. 방학이면 연변에 돌아와 지냈다. 언젠가 여권에 찍힌 도장을 세어보니 10년 동안 13차례를 오갔다.


돌이켜보면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으나 대단한 성과를 낸 것도, 많이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학교에만 붙어 있었다. 교수들이 시키는 번역 심부름도 많이 했고 내가 보고 싶은 책도 나름 많이 봤다. 뉴스도 하루 100건 이상씩 매일 봤다.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자판기 커피도 많이 마셨다. 정확히는 캔에 담긴 펩시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굼벵이 같은 조선족이 점잔을 뺀다고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거다. 치사하고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조선족이 사람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며 뼈를 가루 내는 무서우면서도 악랄한 존재로 변해버린 지가 언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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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조선족은 이런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조선족이 그만큼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하여 인정한다. 이렇게 꾸역꾸역 설명하는 것 역시 조선족의 타당성을 설명하려는 구실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이상하게 교수나 교수들이 지어낸 책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교수라는 계층이 하나의 안락을 추구하면서 조사를 하지 않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묵과한다. 그래서 나는 자료를 찾고 싶지 않고 그저 내가 듣고 본 것으로만 글을 적고자 한다. 앞에 ‘야설(野說. 민간에서 사사로이 떠도는 주장)’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1. 그 역사가 맞는 역사인지 모르겠다.


역사라는 것이 도대체 맞기나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여기서 이 소리를 듣고 저기서 저 소리를 들어도 그 말이 그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제일 싫어한다. 역사를 한다는 사람들의 창의력이 너무 뛰어나고 근거가 박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어떤 흔적 같은 것으로 그 시대를 추리해 낼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하늘 아래 새로운 일은 없다”는 이론과 “하늘 아래 반복되는 일이 없다”는 이론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으로 나눈 이론일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참고 사항에 불과하고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세부적으로 어떠한 시대가 모두 기록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 가설 중 하나 아니면 중국에서 현재 주장하는 ‘조선족’이라는 무리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의 시작은 청나라 때부터 시작된다. 청나라를 지배하였던 만족(만주족이라고도 하나 공식명칭은 만족이다)은 백두산을 성산으로 여기면서 300년 넘게 진입을 금지하였다. 선조들의 시작이 되는 땅을 정토(淨土)로 보존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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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세계 최초의 국립자연공원이 조성된 셈이다. 워낙 신성한 산이라 사람을 다니게 못하니까 자연히 짐승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자기네들도 별로 다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꾸 인기척이 나서 살펴봤더니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밭을 일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봄에 씨앗을 뿌려놓고는 가을에 거두러 오는 방식이었다. 조선인들이 이처럼 중국에서 밭을 일군 원인은 이씨 왕조가 거의 무너져갈 때쯤 가뭄인지 수재인지 재해가 들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청나라는 “당신네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밭을 일구지 못하도록 하시오”하고 국서를 보냈을 것이다. 아마 이씨 왕조도 “알았소”라고 했을 것이다. 얼마 뒤 청나라가 다시 검수 차 사람을 보내 보니 어라? 조선인들이 아예 집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다시 “냉큼 당신네 사람들을 데려가고 다시는 건너 못 오게 하시오”라고 국서를 보냈을 것 같다. 그런데 몇 년째 재해가 지속되어 이씨 왕조가 자국민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백두성산이 전부 옥수수 밭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관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청나라는 개간을 관리하는 부처라는 이름으로 ‘개간국’ 정도의 정부기구를 만들어 관리를 하였다. 옥수수 생산량이 늘면서 중앙정부 차원은 몰라도 지방정부 차원에선 재미를 봤던 것 같다. 차츰 농산물재배지역이 늘어났고 시간이 지나서는 아예 개간을 위한 이민을 받기 시작하였다. 요즘 미국의 이민카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것이 조선족의 시작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철조망과 같은 왕래를 막는 것들이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누구든 국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쳐들어온 시기가 됐다. 한 끼에 자기 머리통만한 쌀밥을 먹고서야 “어~ 배부르네”라고 할 정도로 쌀을 좋아하는 민족이 키가 한 뼘은 작은 오랑캐들이 들어와서 통치하려고 하니 얼마나 싫었을까? 백두산엔 무작정 일본 놈들이 싫어서 오는 사람, 항일의 힘을 키우고자 오는 사람, 장사하러 오는 사람, 사고치고 오는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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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만주땅으로 가다 검문을 당하는 조선인들


그러다 광복이 됐고 남북은 가로막혔다. 남북이 가로막히니 남쪽에서 중국으로 건너올 수 없었을 것이고, 이미 들어왔던 사람들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북쪽에서는 계속 건너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젠 6.25가 터진다. 전쟁과 함께 남으로 북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거기다 전쟁은 조선반도에서 이뤄졌다. 그 포화를 피하여 오가는 사람이 많아 한 무리의 반도인들이 조선족으로 변했다.


조선족의 형성은 그렇게 끝나는 듯이 보였으나 1992년 한중수교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막혔던 국경이 다시 열린 것이다. 물론 그전에 홍콩이나 다른 나라를 통하여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자유롭게 열렸다. 처음에는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나 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투자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한국 사회가 싫어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유학생의 경우, 지금은 별의별 학과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다 들어오지만 초창기에는 한국에서 한의, 중국에서 중의라고 불리는 음양오행과 관련이 있는 학문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것이 제일 매력이 있는 학문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서 중국 대학들도 온갖 시험을 치면서 유학생들의 자질을 엄청 높이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한국 대학에서 떨어진, 또는 미국에 갈 돈은 없으나 중국에 올 돈은 있는 집 자제들이 많이 왔다. 언어의 제한 때문에 연변을 중심으로 많이 와 연변 유일의 대학인 연변대학이 한때 생각지도 못한 돈을 벌었다. 그러자 연변대학보다는 더 매력이 있는 이름을 가진 상해, 북경 등지의 대학들이 입학요건을 완화하면서 유학생을 유치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유학생들은 다른 지역으로 점차 퍼져나갔다.


이어 한국엔 IMF사태가 터진다. 금융 전반에 혼란이 발생한 상황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또는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태, 청도, 북경 쪽으로 한국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년 정도 지속되니 이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3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존에 형성된 조선족 사회와 큰 접촉을 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접촉이 거의 전부다. 물론 현재까지 이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되어 있으나 이들 대부분은 중국식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사고방식이나 생활패턴이 한국인들과 달라졌다. 그런 이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국경이 다시 닫히면 이들은 조선족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작성자:Sp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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